뒤집힌 은하—구부러진 시계—열리는 미래
2025
유지영은 현실의 지속과 경계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도구, 반대로 한 눈에 감각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먼 차원의 것들을 동시에 취해 이를 조형적으로 결합한다. 그의 근작인 <Orrery>(2025) 연작은 태양과 행성의 공전 궤도를 보여주는 모형인 장치(Orrery)에서 출발한다. 이 사물은 지구본을 매듭으로 엮어 놓은 듯 태양을 상징하는 구체를 중심으로 여러 막대와 톱니바퀴를 따라 작은 행성 모형이 연결된 독특한 형태를 띤다. 오러리의 유래와 천체 관측의 역사를 집요하게 좇아가던 작가는 문득 이 기구가 땅을 향해 생장점을 키워나가는 식물의 법칙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풀의 뿌리 마디 마디가 모래알 틈으로 길을 넓히며 영양분을 흡수하는 과정과, 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경로로 연결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작용을 맞붙여 본 것이다. 그리곤 오러리의 위쪽 구체들을 뿌리처럼 아래로 향하게 하고, 땅에서 관찰되는 양상들이 오러리의 위로 올라가도록 구조의 상하 반전을 시도한 입체 작업을 만들어 보기로 한다.
이 연상법은 작가가 오러리가 형상화하는 우주의 움직임과 그것이 지구의 피조물과 맺는 무한한 관계의 고리들을 읽어냈음을 방증한다. 그에게 이 사물은 단순히 천체의 경로를 파악하기 위한 장치이기보다 은하가 품는 모든 존재의 삶을 내포한 알레고리로 인식된다. 실증적인 자료와 사실적 근거에 기반하던 작가의 시각은 점차 누군가와 함께 걸었을 해변에서 발견한 모래 위의 파도 자국, 짙은 밤하늘에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별자리들을 올려다보았던 먼날의 기억으로 연결된다. 역사적 기록과 사적 단상들 사이를 교차 왕복하며 조형적 결정에 다다르는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외적 특징에도 영향을 미친다. 작품에는 작업 초기부터 도드라졌던 조형적 실험의 결과들이 반복적으로 포착된다. 그것은 주로 구멍 내기와 비우기, 빈칸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기존 형태를 다른 재료로 본 떠내기, 그렇게 모은 파편들을 즉흥적으로 조립하기와 같다. 더하기와 빼기의 언어는 익숙했던 것들을 걷어내고 생경한 기호를 제시하기 위한 일관된 수사로서 유지영의 작품 위에서 기능한다.
이를테면 <Orrery> 연작은 기성의 구조를 뒤집어 기존의 기호나 의미를 털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담는 순서로 제작된다. 별들의 위치를 나타내던 많은 표식의 자리는 파도의 너울, 모래의 울퉁불퉁한 표면, 기둥 간에 얼기설기 연결된 체인들로 채워진다. 행성은 맑고 투명한 구슬이 되어 가느다란 뿌리들이 소금이 군데군데 쌓인 지면을 딛고 서도록 하는 생장점의 끝단이 된다. 두 무대로 나누어진 작품의 낮 풍경엔 <Orrery_흐트러지는 해안선 (낮)>에는 파도의 물거품 옆에서 발견했을 조개의 모양이 보이고, 밤 풍경인 <Orrery_닿지 않는 별 사이 (밤)>에는 종이별을 떠낸 까만 덩어리가 상상의 별자리를 구성한다. 작가가 호명하는 그 이름과 위치에서, 별개의 조각들은 문득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함께 모여 작은 우주를 편성한다. 한편, 원형 시계의 모양으로부터 왔을 <Day-Hour-Minute>(2024-5) 연작에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우선 여기엔 숫자가 없다. 대신 잘리고 구부러진 디스크 형태 위로 물이 섞인 안료가 번져있다. 시각을 알리는 눈금과 숫자, 바늘침은 이미 색 안으로 녹아 흩어진 듯하다. 볼록하게 올라온 둔덕에서 물감은 쉽게 미끄러지고, 옴폭 패인 틈에는 색이 더 짙게 머무른다. 마치 매분 매초를 내가 모두 관할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듯, 작가는 둥그런 덩어리의 표면 위를 움직이는 물감의 움직임을 제약 없이 가만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표면에 다시 빗금을 치고 얼룩을 지워내기를 반복해 완성된 작품들은 벽으로부터 볼록 솟아올랐다가 맞닿은 디스크와 겹치고, 때로는 홀로 빈 공간에 달(혹은 해)처럼 떠올라 기억으로부터 흐릿해진 어느 시공을 상기시킨다.
이성적 분석과 감각적 공명의 교차. 어쩌면 현실에서 양극단에 있는 듯 보이는 두 선택지를 동시에 고르는 일은 마치 음과 양의 경계가 멀리 보이지만 가장 가까이 등을 대고 맟닿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다만 사람들은 자주 이 사실을 잊거나 그런 적이 없었던 것처럼 실제하는 것의 모든 면면을 이해하고 정복하려 한다. 반면 실증적인 근거와 촘촘한 논리를 따라 전개되던 그의 작업은 더 이상 인간의 언어로 충분히 설명하기에 어려운 어떤 임계치에 다다랐을 때, 훌쩍 낭만적이고 시적인 영역으로 진입하기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야기의 여지, 통찰의 가능성이 열린다. 설명할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 만날 수 없는 것. 우주로부터 오는 불가사의한 사건과 불가항력적인 힘은 생명들의 삶에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끊임없이 좌절하는 것 사이에 인류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전환점이 있곤 했다. 작가가 일종의 지침서로 삼으며 종종 언급하는 앤서니 애브니의 『별 이야기』를 더듬어 보자면, 인류는 그 태초 때부터 하늘과 땅 간의 유사성을 찾으려고 애썼고, 하늘의 규칙을 거름 삼아 다양한 상상 속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자연을 인간의 관점으로 읽어내고자 했다. 즉, 현대의 삶은 자연을 관찰하고 새롭게 배치하는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작가가 작업의 초기부터 관심을 가졌었던 달력, 시계, 지구본과 같은 사물의 기원 역시 아주 오래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이 사물들의 발명은 해와 달, 물과 땅의 움직임을 탐색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문명 이전의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영적인 의미와 생존의 방향성을 찾고 기원했으며, 근대에는 그것이 과학·천문학·지질학·고고학의 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한때 나는 유지영의 관심사가 큰 범주를 세분화된 규범으로 쪼개어 나누는 여러 유무형의 형식 혹은 그것들의 플레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2019년에 열렸던 그의 개인전 서문에서 나는 그의 작업이 ‘대상이 효용성을 획득 혹은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구조들의 연쇄를 의심하며, 각 항의 위치에 임의의 변용을 가하며 이 문제를 가시화한다’라고 썼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작가는 달력 안에 든 날짜, 원고지 안에 쓰여진 글자를 컵에 채워진 물, 달걀 껍데기 안 흰자와 노른자, 과일 껍질 속에 숨겨진 알맹이와 같은 요소들로 치환하며, 현실의 규칙을 메타 시각으로 사유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 의심과 호기심의 시간을 통과하면 삶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반짝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시선은 더 이상 물질에 머물지 않고, 질서의 이면에 놓인 세계의 작동 원리로 확장된다. 6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 썼던 문장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작가는 이제 구조 자체의 만듦새와 기능을 조작하기보다 그것의 근간이 되는 우주의 이치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현상, 또 의미화된 것들 뒤에 남겨진 흔적들을 응시한다. 시공의 앞뒤로 포개어져 흐름을 전환하는 수많은 비언어적, 비물리적 요인들을 긴 호흡으로 끌어안고 있다.
어쩌면 그는 규율의 반복성과 안정감 안에서의 변주를 넘어, 규칙성에서 무작위성으로 흘러가는 세계의 엔트로피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자가 아닐까. 그것을 때때로 예술이라는 이름 안에서 다시 시각화하여, 암호처럼 얽힌 현재의 얼개를 펼쳐내는 일이 그가 당분간의 지표로 삼은 목표일 것이다. 내 신체와 정신이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머무를 수 없고 이곳과 저곳에 생긴 시간의 주름이 판이한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요즘, 우리에게는 스스로 길을 잃지 않을 신념이 필요하다. 유지영은 그만의 속도로, 그 너울 속에서 한 곳에 닻을 내리기보다 부드럽게 표류하며,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임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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