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컵 실험
– 담긴 것, 쏟아진 것,
또는 그 이상의 것들
— 황재민
엎지른 물 Spilled Water
2018. 10. 12. - 21.
레인보우큐브, 서울
이전에 회화가 이미지를 기각할 필요가 있었을 때, 그 결과물은 시각적으로
인지 가능한 대상물을 추상화하여 표현하는 방법으로 나타났다. 차후 이 방법은 프레임을 짜고 그 위에
안료를 발라 벽에 걸어 볼 수 있게 하는 ‘회화’의 극복으로
발전했는데, 이 이야기는 보통, 그리하여 그림이 환영을 극복하고
보다 ‘순수한’ 미술로 나아갔다는 선형적 서사로 정리된다.
이 서사 안에서, 어쩌면 이미지와 회화의 갈등은 이미지에 대한 (추상)회화의 승리로 잠시 마무리된다. 하지만 지금 추상은 다층적으로 초-순환하는 이미지 세계의 내부로 편입된다. 이건 순수형식으로서의 회화가 불가능해진 역사의 특정 국면과는 큰 관계가 없는데, 거의 모든 것이 텅 빈 기표로 환원되는 오늘의 미디어 상황은 회화를 비롯, 매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시각적 기호를 영점으로 수렴시킨다. 이미지와 회화의 경기는 이때 다시 결과를 짐작할 수 없는 새로운 장면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회화와 같은 미적 미디엄은 전에 없던 페널티를 갖는데, 물질조차 이미지로 환원되는 새로운 세계의 역학 아래서 이제 회화는 ‘이미지가-아닌-것’, 나아가 ‘완전히-이미지만은-아닌-것’으로 스스로를 재정체화 할 필요와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유지영은 회화를 특정한 방향을 따라 형성된 이해와 관습의 집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에는 ‘회화적인 것’의 존재론을 임의로 해체한 다음 재구축하는 개념적 절차가 선행한다. 작가는 회화가 회화로 이해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몇 가지 구성요소를 분할하여 축출한 뒤, 그것이 단순 구성요소 이상의 존재감을 갖도록 확대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회화는 자연히 역사적으로 이해되어 온 회화 매체의 전제를 재검토하는 절차를 동반한다.
전시 《엎지른 물 Spilled Water》에서 작가가 검사를 위해 골라낸 회화의 조직은 바로 이미지다. 작가는 회화에서 이미지가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검토하기 위해서, 일단 이미지를 기각하여 비워버리는 방법을 실험한다. 이를 수행하며 작가는 빈칸에 가까운 지지체support를 설정한 다음 모범이 될 수 있는 시각적 프레임을 화면 위로 붙여 넣는다. 전시에서 쓰이는 모델은 스티커와 도판인데, 이들은 지지체 위로 중립적 이미지를 올려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실험 도구로서 짐짓 빈칸을 연기한다. ‘의미’의 대응물이 아니기 때문에 작업의 임의적 논리와 결부시켜야만 파악이 가능한 이 ‘이미지’는 이해의 층위를 복잡화하여 초순환하는 이미지 세계의 일부로 환산되는 일을 피해낸다.
제목과는 달리, 《엎지른 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엎질러진 물의 상태가 아니라 “엎지른 물”에 해당하는 물리 현상 같은 것을 시뮬레이션하는 일과 가까운 듯하다. 물이 담긴 컵이 눈앞에 있다. 이때 컵의 바닥을 없앤다면 어떻게 될까? 그 뒤 컵을 들어 올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혹은 컵 안에 든 것이 물이 아니라면 어떨까? 우리가 응당 물이라고 상상했던 것에는 사실 다른 명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유지영의 회화를 이루는 것은 이처럼 몇 가지 조건을 바꾸고 교차해가며 진행되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엎지른 물》에서, 지지체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며 서로 대조되는가? 이미지는 탈각되어 어떤 위치로 어떻게 놓이게 되는가? 탈각된 이미지는 지지체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또 무엇이 되어 어떤 방식으로 휘발되는가? 이외에 가능한 질문으로는 또 무엇이 있을까? 전시 《엎지른 물》을 통해 작가가 선보이는 것은 이런 실험의 첫 번째 버전인데, 이는 “좌절”인 동시에 “희망”인 서식으로 교차하면서 오늘 가능한 영역이 어디인지 찾고자 한다.
이 서사 안에서, 어쩌면 이미지와 회화의 갈등은 이미지에 대한 (추상)회화의 승리로 잠시 마무리된다. 하지만 지금 추상은 다층적으로 초-순환하는 이미지 세계의 내부로 편입된다. 이건 순수형식으로서의 회화가 불가능해진 역사의 특정 국면과는 큰 관계가 없는데, 거의 모든 것이 텅 빈 기표로 환원되는 오늘의 미디어 상황은 회화를 비롯, 매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시각적 기호를 영점으로 수렴시킨다. 이미지와 회화의 경기는 이때 다시 결과를 짐작할 수 없는 새로운 장면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회화와 같은 미적 미디엄은 전에 없던 페널티를 갖는데, 물질조차 이미지로 환원되는 새로운 세계의 역학 아래서 이제 회화는 ‘이미지가-아닌-것’, 나아가 ‘완전히-이미지만은-아닌-것’으로 스스로를 재정체화 할 필요와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유지영은 회화를 특정한 방향을 따라 형성된 이해와 관습의 집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에는 ‘회화적인 것’의 존재론을 임의로 해체한 다음 재구축하는 개념적 절차가 선행한다. 작가는 회화가 회화로 이해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몇 가지 구성요소를 분할하여 축출한 뒤, 그것이 단순 구성요소 이상의 존재감을 갖도록 확대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회화는 자연히 역사적으로 이해되어 온 회화 매체의 전제를 재검토하는 절차를 동반한다.
전시 《엎지른 물 Spilled Water》에서 작가가 검사를 위해 골라낸 회화의 조직은 바로 이미지다. 작가는 회화에서 이미지가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검토하기 위해서, 일단 이미지를 기각하여 비워버리는 방법을 실험한다. 이를 수행하며 작가는 빈칸에 가까운 지지체support를 설정한 다음 모범이 될 수 있는 시각적 프레임을 화면 위로 붙여 넣는다. 전시에서 쓰이는 모델은 스티커와 도판인데, 이들은 지지체 위로 중립적 이미지를 올려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실험 도구로서 짐짓 빈칸을 연기한다. ‘의미’의 대응물이 아니기 때문에 작업의 임의적 논리와 결부시켜야만 파악이 가능한 이 ‘이미지’는 이해의 층위를 복잡화하여 초순환하는 이미지 세계의 일부로 환산되는 일을 피해낸다.
제목과는 달리, 《엎지른 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엎질러진 물의 상태가 아니라 “엎지른 물”에 해당하는 물리 현상 같은 것을 시뮬레이션하는 일과 가까운 듯하다. 물이 담긴 컵이 눈앞에 있다. 이때 컵의 바닥을 없앤다면 어떻게 될까? 그 뒤 컵을 들어 올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혹은 컵 안에 든 것이 물이 아니라면 어떨까? 우리가 응당 물이라고 상상했던 것에는 사실 다른 명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유지영의 회화를 이루는 것은 이처럼 몇 가지 조건을 바꾸고 교차해가며 진행되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엎지른 물》에서, 지지체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며 서로 대조되는가? 이미지는 탈각되어 어떤 위치로 어떻게 놓이게 되는가? 탈각된 이미지는 지지체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또 무엇이 되어 어떤 방식으로 휘발되는가? 이외에 가능한 질문으로는 또 무엇이 있을까? 전시 《엎지른 물》을 통해 작가가 선보이는 것은 이런 실험의 첫 번째 버전인데, 이는 “좌절”인 동시에 “희망”인 서식으로 교차하면서 오늘 가능한 영역이 어디인지 찾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