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적 풍경을 갱신하기
— 박지형
One After Another
2019. 11. 1. - 28.
전시공간 (全時空間), 서울
월요일이 지나면 화요일이 온다. 그리곤
수목금토일을 거쳐 다시 월요일이 시작된다. 이 순차적인 나열은 하나의 마디로 여럿 모여 열두 달의 자연스러운
시간의 관습을 만든다. 문자는 하나 이상의 규칙에 따라 서로 달라붙어 단어가 되고, 이 뭉치들이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렬되면 문장이 될 수 있다. 이
문장들은 일정한 물리적 프레임에 차곡차곡 담겨 줄곧 책이나 원고가 된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일련의 선형적
체계는 사회문화적인 관습에 의해 결정되며,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속한 개체들의 의미나
형태를 정의하거나 제한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일상적 사물에서도 기능적으로 최적화된 시스템이 적용된 정렬이나 묶음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 계란은 규격화된 계란 판에 담겨 일정한 단위로 소비되고, 원고지는 한 장에 들어갈 단어의 수를 제한한다. 유지영은 현실에서 한 대상이 효용성을 획득 혹은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구조들의 연쇄를 의심하며, 각 항의 위치에 임의의 변용을 가하며 이 문제를 가시화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 가설이 전제된다. 만약 하나의 거푸집에 속해있던 개체의 일부가 밖으로 탈주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모할까? 내용물들의 열거가 연속성을 가질 것이란 믿음이 부분적으로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게 되는가? 이를테면 <Calendar Series>(2019)처럼 계란이 계란 판의 묶음을 빠져나와 달력의 묶음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계란과 달력의 의미와 기능은 달라질까? <Bric-à-brac>(2019)에서 완벽한 이미지의 구성을 담아내는 회화의 화면 한 부분이 찢어졌을 때, 그 안에 담겨 있던 이미지의 나열은 쏟아져내려 어디로 가는가?
전시장에는 위 질문을 구체화한 예외적 상황이 펼쳐진다. 우선 대상의 배열 체계를 결정하는 용기container는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구멍 난 그리드의 형태로 드러나 있어, 이것의 기존 기능이 다소간 무용한 것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이탈한 색채, 숫자, 이미지는 3차원의 시공간으로 흘러내려 서로 뒤섞인다. 틀의 안팎에는 계란, 시트러스 과일, 컵이 작가가 내린 임의의 결정에 따라 나열되어 있다. 무작위로 선택된 것처럼 보이던 이 사물들은 자신이 예속된 시스템의 속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문제의식을 또 한 번 환기한다 - 말랑말랑한 과일의 껍질은 그 속에 여러 조각으로 나뉜 과육의 크기와 모양을 결정하는 피부로서, 액체를 담는 컵은 그것이 수용하는 매질을 일시적으로 보호하고 형태를 결정하는 또 다른 상위 개념으로서 존재한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분류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그 속에 현실의 사물을 교차, 재배치, 레이어링 하는 플레이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실험체는 당연시되던 일상적 구조의 작위성을 직면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전시 ‘One after another’에서 회화가 갖는 일련의 연쇄적 관계(이미지-캔버스-벽)를 통로 삼아 현실의 분류 체계와 인간의 인식 단위의 역학관계로 비판적 시선을 옮겨간다.
그래서, 유지영은 이 배열을 부정하거나 모두 해체하려 하는가? 사고와 행동의 단위가 되는 개념적, 물리적 장치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적 규범이 만든 수많은 체계에 작은 종말을 고하려 하는가? 작업을 서둘러 의미의 영속된 종착지로 데려가려는 우리의 의무감은 또 다른 언어적 프레임 안에 의미를 말끔히 나열하려는 오래된 관습을 되풀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기호와 의미의 연쇄들을 완벽하게 해체할 수 있는 절대적인 논리나 돌파구는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리어 의미의 단위를 생산해내는 구조적 모델의 경계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이것을 변용할 때, 이 틀의 작동 원리와 속성에 관한 효과적인 비판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의 제스처를 익숙하고 평범한 사물 속에 굳어진 현실의 감각을 순환시키는 작은 신호로 볼 수 있다. 그 신호는 수용자로 하여금 의미에서 해방된 개체들과 나열의 형식 사이를 충분히 표류해볼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한다.
일상적 사물에서도 기능적으로 최적화된 시스템이 적용된 정렬이나 묶음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 계란은 규격화된 계란 판에 담겨 일정한 단위로 소비되고, 원고지는 한 장에 들어갈 단어의 수를 제한한다. 유지영은 현실에서 한 대상이 효용성을 획득 혹은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구조들의 연쇄를 의심하며, 각 항의 위치에 임의의 변용을 가하며 이 문제를 가시화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 가설이 전제된다. 만약 하나의 거푸집에 속해있던 개체의 일부가 밖으로 탈주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모할까? 내용물들의 열거가 연속성을 가질 것이란 믿음이 부분적으로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게 되는가? 이를테면 <Calendar Series>(2019)처럼 계란이 계란 판의 묶음을 빠져나와 달력의 묶음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계란과 달력의 의미와 기능은 달라질까? <Bric-à-brac>(2019)에서 완벽한 이미지의 구성을 담아내는 회화의 화면 한 부분이 찢어졌을 때, 그 안에 담겨 있던 이미지의 나열은 쏟아져내려 어디로 가는가?
전시장에는 위 질문을 구체화한 예외적 상황이 펼쳐진다. 우선 대상의 배열 체계를 결정하는 용기container는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구멍 난 그리드의 형태로 드러나 있어, 이것의 기존 기능이 다소간 무용한 것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이탈한 색채, 숫자, 이미지는 3차원의 시공간으로 흘러내려 서로 뒤섞인다. 틀의 안팎에는 계란, 시트러스 과일, 컵이 작가가 내린 임의의 결정에 따라 나열되어 있다. 무작위로 선택된 것처럼 보이던 이 사물들은 자신이 예속된 시스템의 속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문제의식을 또 한 번 환기한다 - 말랑말랑한 과일의 껍질은 그 속에 여러 조각으로 나뉜 과육의 크기와 모양을 결정하는 피부로서, 액체를 담는 컵은 그것이 수용하는 매질을 일시적으로 보호하고 형태를 결정하는 또 다른 상위 개념으로서 존재한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분류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그 속에 현실의 사물을 교차, 재배치, 레이어링 하는 플레이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실험체는 당연시되던 일상적 구조의 작위성을 직면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전시 ‘One after another’에서 회화가 갖는 일련의 연쇄적 관계(이미지-캔버스-벽)를 통로 삼아 현실의 분류 체계와 인간의 인식 단위의 역학관계로 비판적 시선을 옮겨간다.
그래서, 유지영은 이 배열을 부정하거나 모두 해체하려 하는가? 사고와 행동의 단위가 되는 개념적, 물리적 장치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적 규범이 만든 수많은 체계에 작은 종말을 고하려 하는가? 작업을 서둘러 의미의 영속된 종착지로 데려가려는 우리의 의무감은 또 다른 언어적 프레임 안에 의미를 말끔히 나열하려는 오래된 관습을 되풀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기호와 의미의 연쇄들을 완벽하게 해체할 수 있는 절대적인 논리나 돌파구는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리어 의미의 단위를 생산해내는 구조적 모델의 경계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이것을 변용할 때, 이 틀의 작동 원리와 속성에 관한 효과적인 비판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의 제스처를 익숙하고 평범한 사물 속에 굳어진 현실의 감각을 순환시키는 작은 신호로 볼 수 있다. 그 신호는 수용자로 하여금 의미에서 해방된 개체들과 나열의 형식 사이를 충분히 표류해볼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