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출처로 구성된 복합물―이미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 콘노유키

— 출처: 조선통신사 월간소식 제6호



 

엎지른 물 Spilled Water

2018. 10. 12. - 21.
레인보우큐브, 서울 


이미지에 항상 따라다니는 출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여기서 말하는 출처는 예술가의 머릿속에서 (처음에는 안 보이지만) 흐릿하게 나타난 인상처럼 모호하거나, 사진에 촬영된 그때 당시처럼 보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킨다. 동굴벽화는 그런 식으로 실제 대상과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반영의 단계에서 오늘날에 그 장면을 기록한 사진과 편집되고 밈으로 떠도는 이미지로 모습을 변형하면서 시각적으로 각인된다. SNS에서 떠도는 이미지는 정당성(저작물의 저작권, 애초에 있던 위치를 명시해야 하는 책임, 나아가 어떤 가능성을 조장한다는 우려를 포함해)의 심의대상이 된다. “어디서 가져오셨습니까?” “글쎄요 어디서 가져왔는데 기억이 안 나서..” 설령 애초에 이미지가 있던 위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곳에 이미지는 존재한다. 머릿속에 숨어 있던 상상이나 편집되고 유통되는 경로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의도를 모른다고 해서 이미지는 나타난 이상 거기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미지란 구성되어 오면서 지금 그 자리에 존재하는 대상에 더 가깝다.

그러기에 이미지는 있던 것들이 순전히 옮겨진 것으로 보기 힘들다. 시각적으로 변형되고 편집되고 부분 확대한 (혹은 축소한) 대상들로서, 이미지는 실제와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듣고 이미지가 이데아인 원본에서 멀어진 결과로 수렴되거나,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를 통해서 원본의 가치를 수평화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주제는 이미지와 원본의 관계가 아니다. 실제나 원본이 어떤 유일함에 근거하여 이미지를 권위적으로 종속시킨다면, 앞으로 분석하려는 관계는 이미지와 출처의 관계이다. 둘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머릿속이나 작가의 사진 기록, 나아가 컴퓨터 화면 상에서 시뮬레이션 되는 소프트웨어의 이미지까지, 결과물인 이미지는 다른 차원에서 내보내기된다. 이때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가시화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다는 점에서 생산물이다. 이미지가 지금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연은 복잡한 과정과 다양한 소재의 결과를 내포한다.

여기서 이미지의 출처는 그야말로 단일하지 않다. 원본이나 실제가 단독적 위상을 갖는다면, 출처는 복합적이다. 제작 과정의 시간, 소재가 된 모티프가 소유하는 공간, 그리고 머릿속에서 병합되고 배치되는 시공간을 내보내는 곳으로 우리는 이미지를 삼는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이미지에 간직될 뿐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앞서 나온 질문과 대답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이미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작 과정과 건너오기 전의 구체적인 위치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크로핑되고 병합되고 모르는 사이에 열화되고 다음 이미지의 소재가 되는 과정에서 이미지는 과정과 원래 있던 위치를 잘 모르면서도 거기에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미술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시각 작업을 볼 때, 그것이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어떤 소재-레퍼런스를 끌고 왔는지, 나아가 어떤 재료로 기록하고 편집했는지 알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재질을 분석하는 연구 대상도 아니기에 제작 과정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 작품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로 이미지-출처의 관계는 후자가 물러선 채 전시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2018년에 열린 유지영의 개인전 《Spilled Water》(2018, 레인보우큐브갤러리)에 소개된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지-출처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다. 출품작은 모두 공통적으로 이미지가 있던 자리를 보여주는 캔버스와 그곳에서 벗어난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Plate XIXX〉(2018)와 〈1-13 from Plate XIXX〉(2018)에서 새는 어떤 책의 한 페이지(1874년에 출판된 『History of North American birds』)에서 벗어난 한편, 〈좌절의 서식〉(2018)과 〈희망의 서식〉(2018)1에서 추상화된 캔버스는 원래 캐릭터 스티커 이미지에서 변형되어 전시공간에 따로 배치되었다. 이미지가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이미지가 놓인 자리는 시각적으로 그대로 반영된 경우도 변형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작품은 어떻게 이미지-출처의 관계를 포착할까?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삼은 모티프=레퍼런스가 어느 정도 명확하다는 측면이다. 예를 들어 〈1-13 from Plate XIXX〉의 새와 〈310-756 from Plate V. and VIII〉(2018)의 달걀은 이미지가 독립적으로 바닥에 서 있으나, 옆에 놓인 작품―〈Plate XIXX〉와 〈Plate VIII〉―을 각각 보면 그 이미지들이 한때 어떤 책의 한 페이지에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그림은 옆에 놓인 작품을 통해서 스티커의 캐릭터 이미지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처럼 벗어난 이미지를 통해서 이미지-출처의 관계를 공간적으로 포착한다. 우리는 이미지의 빈 자리를 같이 보면서 바닥에 놓인 작품에 벗어났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새와 달걀, 그리고 추상적으로 그려진 캐릭터는 명확한 출처가 바로 옆에 있다.

이때 출처에서 벗어난 이미지는 독립적으로 보였다가 다르게 읽혀진다. 작가가 유화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새와 달걀의 이미지는 사실 어떤 화가가 책으로 엮은 페이지에 들어간 그림―번호를 보면 아마도 캡션도 있었을 것이다―이었고, 추상회화는 기존 애니메이션의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컷이었다. 이런 귀결은 어쩌면 작가가 처음에 참고한 자료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미술작품 일반에 한정 지을 일 없이, 이미지-출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미지-출처의 관계에서 후자는 이미지 뒤에 물러선다. 이 물러간 제작 과정을 유지영의 작품은 보여준다. 그가 작품에 참조하는 두 가지 레퍼런스, 바로 책의 한 페이지와 스티커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 구성물이다. 실제 새와 달걀을 특정 각도와 비율에 맞게 그리고 번호와 대응하는 캡션 없는 페이지와 TV화면의 네모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크로핑된 다음, 자신이 원하는 곳에 붙일 수 있도록 제작된 스티커는 여러 출처를 통해서 구성된 복합물이다. 작가가 각각 페이지와 스티커를 단일한 ‘원본’으로 간주하고 재현만 했다면, 이미지-출처 관계는 뒤에 물러섰을 것이다.

심플한 해석을 하자면 유지영의 작품은 책이나 스티커에서 끄집어내어 자율성을 이미지에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이미지가 있던 자리를 지지체라 부를 수도 있다. 지지체를 통해서 달걀이나 새는 받쳐지고 있었다는 판단은 그의 전시를 보고 내릴 수 있는 아주 심플한 해석이다. 이미지를 지지체와 원본에 귀속시키는 ‘간결한 귀결’과 달리, 작품은 이미지가 맺는 복합적인 출처의 관계를 보여준다. 작가가 선택한 레퍼런스, 바로 책의 한 페이지와 스티커는 지지체의 튼튼함을 갖추지 못했다. 이미지의 빈 자리는 독립적으로 벗어난 이미지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리워하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미지의 빈 자리가 벗어난 이미지들을 그리워한다. 출처의 복합물인 이미지를, 작가는 귀속과도 원본의 복수화도 아닌 방법을 통해서 시각화한다. 전시공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는 (‘지지체 아닌’) 작품과 바닥에 독립적으로 작품을 흩뜨려 배치하면서, 두 가지 레퍼런스가 애초에 구성물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빈 자리를 지지체라는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이미지와 캡션, 각도, 기하학적 윤곽선 처리들로 구성되는, 바로 그것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의미로 이미지의 빈 자리는 지지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