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횡단을 지속하는 법
김성우 (큐레이터 /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2023

“시간은 내적 경험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실제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시간은 한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다.” –앙리 베르그송

근대적 시간의 개념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정밀한 시간 측정 장치의 개발로 이어진다. 산업화는 생산과 노동의 조직화를 촉진하고, 정확한 시간의 측정과 조정은 일정한 흐름 아래 생산성과 효율성의 증대에 기여하며, 시간의 표준화로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교통과 통신의 발전은 근대적 시간 개념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를테면, 더욱 빠른 이동 수단의 개발은 장소에서 장소로의 이동 사이에 소요되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켰고, 시간을 조율하는 능력 향상을 위해 정확한 시간표와 일정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렇게 거리와 시간의 밀접한 관계는 이성과 합리의 발전 아래에서 더 이상 물리적 공간에 종속되지 않는 시간개념으로 확장한다.

한편,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은 단순히 순간의 연속이 아니며, 삶의 흐름과의 깊은 연관성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시간이란 단순히 양적 개념이 아니라. 내적 경험의 질적 측면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간의 측정과 통제에 대한 욕망은 이질적 시간을 동질적 공간에 고정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¹, 이질적 시간을 동일한 공간에 정박시키고, 서로 다른 사건이나 상태를 동시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시간의 측정과 통제의 욕망은 시간을 더욱 정량화하고, 계량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며, 두 개의 것이 하나의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불가입성(impenetrability)은 각기 다른 장소에 고정된 하나의 ‘순간’만을 존재하게 하려 하고, 그렇게 시간은 보다 일정하고 예측 가능한 개념으로 인식된다.

이번 전시와 작품을 논하기에 앞서 잠시 유지영의 기존 작업을 살펴보자. 작가는 ≪Spilled Water≫(레인보우큐브, 2018)에서 이미지가 떠나고 남은 텅 빈 자리 – 음각으로 가운데가 빈 채로 테두리만 남은 틀 – 와 그로부터 자유를 찾은 이미지 – 디테일한 묘사로 비로소 의미를 지닌 실체 – 의 관계를 조직한다. 그리고‘엎지른 물(Spilled Water)’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물’과 ‘컵’이라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통해 관습적 규약으로서의 회화와 매체 차원에서 오늘날 그것이 존재하는 전제를 검토한다. 사회문화적 관습에 따라 결정되는 암묵적 합의는 최적화된 시스템(으로 오인되는) 차원에서 적용되는 일상의 단위와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One After Another≫, 전시공간, 2019). 작가는 효용성이란 이름 아래 구축된 체계를 계란판과 달력, 원고지의 형식을 전유해 내용물과 용기(container), 즉 의미와 그것을 담는 구조-형식의 관계로 연장하고, 그 사이에서 문화적 규범에 의해 습득한 기존 인식 자체를 뒤흔든다.

앞서 기술했듯, 그가 취하는 형식이나 형태는 사회적 체계나 규범에 근거하며, 그 의미와 형식의 긴밀한 관계는 우리의 기존 인식체계를 불안정하게 하는 차원에서 작동한다. 애초에 주어진 규칙은 의미망을 조건 짓는 한계일 뿐이며, 의미를 운반하는 이미지는 그로부터 이탈을 시도하거나 또는 안착할지언정 끝없는 지평을 향해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그렇게 대상을 체계화하는 조건으로 존재할 용기(container)는 찢어지거나 구멍 난 형태로 존재함으로 더 이상 의미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유지영은 본 전시 ≪사이-횡단≫에서 근대 이후로 고안된 시간의 개념과 체계로부터 탈주를 시도한다. 우선 그는 <Day-Hours-Minutes>연작에서 시간의 단위가 공간의 각도와 관련이 깊다는 점에 착안하여 원형의 캔버스를 선택한다. 360도의 원 위에 하루의 일과를 시간이나 분 단위로 분할하여 표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스케쥴링 방법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이지 않은, 그러나 12시간을 한 주기로 나누는 시간 체계인 12진법의 시간 개념을 가리키는 이러한 형태의 캔버스는 꽤 직설적인 설득력을 지닌다. 작가는 이 원형의 타임라인에 전시 준비 기간 중 특정한 일자에 이동한 공간을 시간 단위로 나누고 이를 회화로 옮긴다. 그리고 온전한 원형 캔버스에는 <A Day>라는 제목을, 그리고 이가 빠진 형태의 원형 작업에는 조각이 빠지고 남은 만큼의 각도를 시간으로 치환하여 명명한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일day’-‘시hour’-‘분minute’으로 분할, 연쇄되는 시간 구조와 숫자의 단위로 구분되는 ‘순간’에서 벗어나 그것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지속(duration)’에 주목한다. 다시 잠시 베르그송의 언어를 빌자면, “순수한 지속은 명확한 윤곽도 없고, … 수와는 어떠한 유사성도 없이, 서로 녹아들고 서로 침투하는 질적인 변화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므로 <Day-Hours-Miutes>는 원형의 패널 위로 작가가 자유롭게 그려 넣은 회화적 터치가 암시하듯, 과학적으로 측정되고 체계화된 숫자로서 공간화된 시간에 머무르지 않고 그사이를‘지속’하는 ‘흐름’이며, ‘지나가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환기한다.  

한편, 벽에 기대어선 <Day-Hours-Minutes>과는 조금 다르게 바닥에 위치한 <Long-Distance Relationship>연작은 하나 이상의 하루가 겹쳐선 조각이다. 통신 기술의 발달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신속한 의사소통을 가능케 했지만, 그럼에도 각자가 위치한 시간대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문자 메시지는 시차를 두고 답신이 오기도 하며, 그렇게 다른 시간대에 속한 타인과의 대화는 두 시간대가 섞이는 경험에서 비롯된 생경함으로 자신이 속한 시간과 위치를 일깨운다. 작가의 말마따나 “내 시간을 접고, 상대방의 시간을 오려서 서로의 엇갈리는 시간대를 겹치는 일”로 시작한 이 조각들은 “익숙한 시간의 선형성이 잠시나마 느슨해지는 순간”의 형상화이다. 공간에 종속되지 않는 연결일지라도 우리는 겹치고 포개어 선 구조의 틈새에서 번번이 발생하는 시간의 낙차를 빈번히 마주하게 된다.

유지영의 <Time Zone Panel> 연작은 지구의 다양한 지역에서 통용되는 시간 표준의 형식에 기반한다. 작가는 경도를 기준으로 시간대를 나눠 시차에 따른 혼동을 방지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고안된 ‘표준시간대(Standard Time Zone)’의 인위적 경계와 구획된 시간 체계에 주목한다. 각각의 패널은 협정 세계시(Universal Time Coordinated, UTC)의 시간대별 특정 구역의 형태를 모티브로 한다. 원목, 쇳가루, 제스모나이트와 같이 다양한 재료로 제작된 패널은 UTC+0을 기준으로 짙은 색을 띤다. 여기서 색의 짙기는 철가루의 부식 정도나 나무의 표면색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재료적 성질을 통해 시간의 개념을 패널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각 시간대에서 추출된 영역은 세계의 통합적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합리적 시간 개념의 모순을 폭로하듯 자의적으로 뒤섞이고 나열된다. 패널을 이어주는 경첩과 클램프, 자물쇠와 사슬은 전 세계적 시간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 – 표준시간대 – 의 원리를 비웃듯 시간대 사이를 횡단하며 연결한다. 이는 각 패널보다는 패널과 패널의 사이, 그 연결의 구조와 틈새에 눈 돌리게 함으로 인위적으로 규범화된 시간과 물리적 시공의 경계면이 지닌 허구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유지영은 이러한 작업들에 몇 가지의 장치를 더해 공간 위를 관통하거나 비선형적으로 가로지르는 모종의 시간 – 전시 – 를 가설한다. 그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구획하고 기능하게 하는 벽과 바닥이 만나는 이음새에 구조를 더해 기능과 효율의 경계를 허문다(<Rail>). 작품이라기보단 전시 공간의 시간성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제스처에 가까운 이것은 단단하고 견고하게 구획된 공간의 면과 면이 만나는 경계에 반복적 리듬을 부과하며, 전시의 선형적 흐름을 끊고 다차원의 시공으로 연장을 시도한다. 1.5층에는 음각으로 떨어져 나온 원형의 작업(<Day-Hours-Minutes>연작과 <Long-Distance Relationship>)으로 온전히 향하려는 시선을 차단하는 구멍 뚫린 막(<Leftover>)을 설치한다. 과정이 결과로 수렴되고, 하나의 오브제로 단단하게 결박된 그간의 시간은 대상과 부산물(leftover) 사이, 시선이 교란되는 틈새에서 현시한다. 어쩌면 전시라는 시공은 ‘시간’이라는 체계가 지배하는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기에 적절해 보인다. 거칠게 말하자면, 전시(장)는 파편화된 이미지를 이어내며 획득하는 비선형적 서사로 생동한다. 그곳은 때로는 시간이 멈춰 선 영원을 향하며, 때로는 현재를 새롭게 마주하게 하는 과거가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써 내려간 모종의 미래로 충동한다. 심지어 나열되고 배치된 이미지는 순서와 상관없이 관객의 의식 안에서 자유롭게 뒤섞이며, 현실의 조건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상의 시공으로 안내한다. 이러한 전시의 본성(nature) 위로 유지영이 쌓아 올린 시간은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우리 삶의 양식을 규율화하는 체계가 아닌, 규범화된 양식 사이를 횡단하고 지속(duration)하는 삶의 ‘존재 형식’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¹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시간은 연속성과 내적 경험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계속해서 대체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간은 동질적이며, 물체들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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